[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평양 금수저가 두만강 건넌 이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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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 평양에 수없이 많은 외화 식당과 외화상점에서 거기서 이제 불고기 먹고 맥주 먹고 막 놀거든요. 열두시에 문을 잠그고 밤새 진짜 흥청망청…

박송미: 2010년 이후부터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누구네 집 딸내미가 없어졌대’ 라고 하면 ‘중국 갔겠지, 탈북했겠지’

김강우: 평생 돈 못 받으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삶이 너무 싫었던 것 같아요. 저도 ‘가다가 잡히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고민을 진짜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잡히면 최선의 방법은 자결하는 거고…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박성진: 탈북한 가장 첫 번째가 정치적인 이유죠. 그때 저희 큰아버지는 일본에서 파친코 사업을 하면서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었던 거의 준재벌급이었대요. 그래서 늘 오시면 이제 10만엔씩 저한테 매해 제 생일마다 10만엔을 선물로 줬거든요. 90년도에 만엔이면 한 70불 정도 했어요. 그러면 한 700불 정도가 되거든요. 그러면 뭐 북한에서는 어마어마한 돈이에요. 한 500불이면 집 한 채 살 정도였으니까요. 평양에 수없이 많은 외화 식당과 외화상점에서 거기서 이제 불고기 먹고 맥주 먹고 막 놀거든요. 열두시에 문을 잠그고 밤새 진짜 흥청망청… 그런데 그렇게 저희한테 돈을 보내주시던 저희 큰아버지가 2천년도 초반에 돌아가십니다. 이제 일본에서의 돈이 오는 거는 이제 끝이 났구나 라고 생각을 했고요. 그러다가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2002년도에 북한에서 처음으로 집단체조 아리랑을 만들어 냈어요.

2002년 김일성의 9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처음 선보였으며 10만 명이 참여한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 공연으로 꼽히는 집단체조 아리랑, 평앙에서 호화롭게 살던 박성진 씨는 공연 연습 현장에서 처음으로 살벌한 인생의 위기를 겪고 탈북을 결심합니다.

박성진: 나가서 공연을 하랬는데 노래 제목이 삼지연 기념비라는 노래예요. 뭐 이런 성악적인 노래예요. 근데 제가 불렀던 거는 “삼지연 기념비 찾으니 그리운 모습들이 보이네~” 이런 식으로 부른 거죠. 근데 갑자기 마이크가 딱 꺼지더니 “너 당장 올라와! 너 왜 남조선 창법으로 노래를 하냐” 이거예요. 저를 세워놓고 욕을 하는데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 그걸 본 거예요. 그때의 모멸감… 그래서 아버지가 그때 결심을 했대요. ‘우리 성진이는 십중팔구 정치범 수용소로 들어갈 애다. 얘는 북한에 살아남지 못한다’라는 걸 아버지가 직감을 했대요. 그러더니 “너 만약에 아버지 고향으로 가겠다면 같이 갈 수 있어?“라고 물어봤어요. 아버지 고향이 한국이잖아요. 저는 진짜 1초도 망설임 없이 ‘나 가겠다’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탈북을 결심해야 했던 고난의 행군 때와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탈북의 이유는 달라집니다. 남북하나센터의 설문조사 결과 2012년 북한 주민들이 탈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여전히 식량부족 때문이었고, 자유를 찾아서, 북한 체제가 싫어서,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가족을 따라서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 뒤 2022년에는 탈북의 가장 큰 이유가 자유를 찾아서 였고요. 식량 부족, 가족의 더 나은 생활환경을 위해, 먼저 한국에 간 가족과 살기 위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등의 순으로 바뀐 것이죠.

박송미: “첫사랑 오빠 그리운 오빠 꿈 속에도 보고픈 오빠 추억 속에~” 모르겠어요. 남한 노래예요. 이게 근데 되게 오래된 노래인데 북한에서 살짝 뭔가 이제 연애 시작하려 할 때 이제 애들이 흥얼흥얼 대면서 그때쯤 좀 유행한 노래예요.

2019년 탈북해 2020년 한국에 입국한 박송미 씨는 먼저 한국에 정착한 엄마의 도움으로 그나마 수월하게 한국에 올 수 있었는데요. 그녀가 탈북할 당시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한국 노래를 흥얼거리고, 탈북한 가족이 있는 집은 먹을 게 풍족해 부러움을 느끼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송미 씨도 당장이라도 탈북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박송미: 2010년 이후부터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누구네 집 딸내미가 없어졌대’ 라고 하면 ‘중국 갔겠지, 탈북했겠지’ 이제 그런 소리가 쉽사리 나오는 것 같아요. 2015년 봄에 이제 연락이 됐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엄마가 브로커 보내면 한국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남은 할머니 때문에… 할머니가 2013년부터 되게 몸에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기저귀로 계속 소변을 받아내고 대변을 받아내고 했었는데 엉덩이 쪽에 이제 다 썩는 거예요. 욕창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막 구더기가 막 끼는 거예요. 그렇게 할머니를 이제 보내고 압록강을 넘을 때는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오히려 ‘이 강만 건너면 내 인생에 반전이 있다’ 이런 설렘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현재 대학생인 김강우 씨는 2016년 탈북해 2017년 한국에 정착했는데요. 북한에선 원하는 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노예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두만강을 건너다 죽더라도 탈북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김강우: 2009년도에 북한에서 화폐 개혁을 했는데 그때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빼앗기고 3일 정도 지나니까 물가가 다시 원래 가격 그대로 다 올라간 거예요. 뭐 쌀 1kg에 몇 천 원씩 하고 이러니까 그 10만 원 가지고 어떻게 생계를 이제 유지가 안 되는 거죠. 그냥 다 순간에 거지가 된 거죠. 그때 여파로 인해서 2~3일에 막 한 끼씩 먹으면서 한 3년 넘게 배를 곯았어요. 그래서 중국에 친척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할아버지 형제들이. 그래서 아버지가 도움을 받으러 이제 가겠다고 8월 말에 떠나셨는데 11월달쯤에 이제 소식이 온 거예요. 북한 청진시에 있는 어떤 보위부 집결소 안에서 매 맞아서 돌아가셨다고. 저희 양강도에서 함경북도까지 걸어가서 그 산에 돈이 없다 보니까 아버지를 언 땅 파고 그냥 묻었거든요. 관도 없이… 과연 죽이기까지 할 죄인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제가 그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건 노동자 밖에 없는데 평생 돈 못 받으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삶이 너무 싫었던 것 같아요. 저도 ‘가다가 잡히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고민을 진짜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잡히면 최선의 방법은 자결하는 거고 그런 각오를 계속 했던 것 같아요. 수없이…

박성진: 딱 두만강을 건넜을 때 이제 평양 시민증이라고 하죠. 그거를 빡빡 찢어서 두만강에다 이렇게 버리면서 ‘내 다시는 이 여기다 발을 안 딛는다’ 하고 이렇게 떠났거든요. 만 20살에 이 군복을 입고 만 30살에 이 옷을 벗었어요. 그러니까 만 10년을 이 옷을 입고 무엇인가 나라를 위해서 한다고 했는데 10년을 이 옷을 딱 벗었는데 되게 허무하더라고요. 북한에서 제 인생에서 가장 슬픈 저의 한 면인 것 같아요.

김은주: 탈북 첫날부터 저희가 중국에서 살아야 했던 삶이 그냥 순탄치 않다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지긋지긋한 북한 땅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탈북에 성공했지만 당장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다음 시간에는 탈북에 성공했던 바로 그 날로 되돌아가 봅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한덕인